공포의 검정, 분노의 빨강… 코로나 키즈가 가장 많이 쓴 크레파스 색깔

마스크 쓴 사람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주르륵 비처럼 내린다. 배경은 진빨강과 진파랑으로 양분됐다. 얼굴에 나타난 건 오직 ‘슬픔’과 ‘고통’뿐. “코로나 하면 생각나는 것을 자유롭게 그려 보라”고 하자, 서울 휘봉초등학교 한 어린이가 그린 장면이다.

이 그림은 어떤 심리를 담고 있을까?

“머리카락, 귀가 그림에서 다 빠졌죠. 얼굴만 크게 그린 건 자기 감정이 그만큼 강렬하고 화가 난다는 거예요. 옷은 자연스러운 연두색인데, 배경은 강렬한 빨간색 파란색을 같이 넣었잖아요. 물, 불, 화, 분노, 슬픔… 자기도 너무 아파서 주체 못 할 감정 교차가 많았던 거죠. 스트레스의 표현이에요.”

미술로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김선현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의 풀이다.

‘권위자’ 김선현 교수와 함께 미술치료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시기를 버티고 성장해야 했던 70여 명의 ‘코로나 키즈’를 만났다. 아이들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기 위해, 임상미술치료 권위자인 김선현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대한트라우마협회장) 연구팀과 함께 미술치료를 진행했다.

그림에 드러난 아이들의 감정과 경험은 더없이 솔직했다.

한 아이는 코로나에 걸려 열이 나는 듯한 ‘우리 동네’를 그렸고, 다른 아이는 행복과 재미를 빨아들이는 ‘코로나 블랙홀’을 형상화했다. 텅 빈 학교 운동장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모습, ‘친구 보고 싶다’며 침대에 누워 눈물 흘리는 장면도 있었다. 팬데믹 시기에 상실하고, 아파하고, 또 그러면서 조금씩 성장한 아이들의 마음이 도화지에 다채롭게 들어찼다.

본보 취재팀은 그림치료를 위해 서울 동대문구 휘봉초를 비롯한 다수 교육·보육기관에서 만 9~12세(초 3~6학년) 아동 73명을 만났다.

어린이들에게 ‘코로나 하면 생각나는 것’이란 주제를 주고 24색 크레파스를 이용해 8절지 도화지에 30분간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그중 70점을 김선현 교수와 미술치료 전문 연구원 2명이 함께 분석했다.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의 ‘정신건강 실태조사’ 문항에 기반한 ‘코로나 스트레스·대인관계 설문’도 함께 진행, 그림 분석에 참고 자료로 활용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심

아이들은 그림에서 무엇을 나타내려 했을까? 그림의 내용과 주제로는 일단 ‘질병·바이러스(32.9%)’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많은 아이들이 멀리 퍼지는 바이러스, 마스크의 답답함, 코로나 감염 당시 느낀 통증 등을 표현했다.

올해 4학년이 된 휘봉초 배○○ 어린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점차 퍼지면서 사람들이 마스크를 써야 하고 비행기(그림 정중앙)도 탈 수 없게 되는 등 일상의 불편함’을 표현했다. 김 교수는 “바이러스가 서로 연결돼 있어 한 명만 걸려도 전염성 때문에 다 퍼진다는 것”이라며 “감염에 대한 불안감이 느껴지고 강제적인 일상의 변화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임○○ 어린이는 ‘자가격리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해 답답했던 마음을 드러내며, 한 집안에서도 서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가족의 모습’을 표현했다. 잦은 코로나 검사로 인한 고통의 경험도 그림에서 나타난다.

친구 대신 인형과 놀며 버틴 팬데믹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아쉬움과 답답함, 활동 제한으로 인한 고립과 외로움 등도 ‘관계 단절'(15.6%)이라는 주제로 나타났다.

신○○ 어린이는 코로나에 걸려 안방에 홀로 있는 ‘나’와 나를 위로해 주는 인형 ‘꾸꾸’를 함께 그렸다. 자가격리 경험에서 비롯된 ‘관계 단절’의 표현이다.

김 교수는 “해당 아동의 설명을 들어보면 여름에 코로나에 걸려서 엄마는 에어컨을 틀어주고 나갔고, 안방에서 일주일 내내 못 나갔다고 한다”며 “새까만 텔레비전의 검정색에서 격리, 답답함, 우울 등이 잘 나타나고, 방바닥에 엎드려 무기력하게 있는 아이 모습에서 고립감과 외로움이 느껴진다”고 분석했다.

최○○ 어린이가 그린 코로나의 풍경에 대해, 김 교수는 “자유롭게 나가서 놀지도 못하고, 쓰고 싶지 않은 마스크도 억지로 써야 했던 기억을 나타냈다”며 “시무룩한 아이의 표정에서 갑갑함과 부정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역사회'(12.9%)에 대해 표현한 아이들도 상당수였다. 주로 본인과 동네 주변 사람들의 감염, 인적이 드문 놀이터와 도로, 신문과 텔레비전에 보도된 ‘코로나 감염자 수 증가 뉴스’ 등이 주된 내용이다.

양○○ 어린이가 그린 그림의 제목은 ‘코로나 걸린 우리 동네’였다. 김 교수는 “코로나에 걸려 집마다 빨갛게 열이 나는 우리 동네를 표현했다”며 “빨간색의 강조로 코로나 감염에 대한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고 풀이했다.

코로나 키즈 그림 특징은 ‘가족의 단절’

코로나는 ‘살을 부대끼는 가족’의 한 지붕 아래 생활 모습도 바꾸어놓았다. 평상시 아이들에게 “일상을 그려보라”고 하면 가족들과 식사하는 모습이나, 거실에서 텔레비전 보는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팬데믹 시기 ‘가족'(11.4%)을 주제로 한 그림의 특징은 바로 가족 간의 단절이었다. ‘구획 나누기’로 가족 구성원을 의도적으로 분리해 표현한 그림이 다수였다. 이는 자가격리와 거리두기 등으로 가족 간의 대면 상호작용도 어려웠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팀은 분석했다.

주○○ 어린이는 그림에서 ‘마스크 쓴 우리 가족의 서로 다른 다양한 표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엄마는 마스크가 자꾸 움직여 불편해 보이고, 아빠는 마스크가 거추장스러운 모습이다. ‘나’는 마스크로 인해 안경에 습기가 차서 힘든데, 재미있게도 식구들 중 코로나에 한 번도 걸린 적 없다는 형의 얼굴만 평온한 표정으로 그려냈다.

코로나 팬데믹은 학교생활도 완전히 바꾸었다. ‘학교·수업(12.9%)’을 주제로 한 그림들에서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방에서 아이 홀로 ‘원격수업’을 하는 장면, 현장학습을 갈 수 없어 아쉬워하는 반 아이들, 텅 빈 운동장, ‘집콕’ 중에 학교생활을 그리워하는 아이와 창밖에 가득한 코로나 바이러스 등이 표현됐다.

‘여행'(2.9%)이 주제인 그림도 일부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아쉬움, 하늘길이 막혀 타지 못하게 된 ‘비행기’도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여행 가는 상상을 하며 황○○ 어린이가 그린 그림에 대해 김선현 교수는 “캠핑에 가는 생각과 친구들과 손잡고 노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어 우울해져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서 사회적 상호작용과 대인관계 욕구의 좌절로 인한 심리적 어려움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왼쪽 하단의 ‘나’와 오른쪽 친구 사이의 거리감도 잘 드러난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출처 : 공포의 검정, 분노의 빨강 코로나 키즈가 가장 많이 쓴 색깔 (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