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전체를 검게 칠한 아이, 당신이 부모라면 어떤 생각?

 “아이는 힘들면 어떤 방식으로든 신호를 보내요. 이걸 놓치면 아이는 ‘나는 혼자구나’ 하고 느끼고, 상처는 깊어질 겁니다. 아이가 말을 안 한다고요? 그럴 땐 그림을 보세요. 그림으로 아이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30년 임상 경력의 미술치료 전문가 김선현(디지털치료임상센터장)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교수는 미술 치료의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르고 지나칠 뻔한 아이의 구조 신호를 그림으로 포착해 제때 적절한 도움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세계미술치료학회장, 대한임상미술치료학회장 등을 역임한 자타 공인 국내 최고의 미술 치료 권위자다. 그는 30년간 마음의 병을 안고 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가족과의 이별, 성폭력 등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부터 세월호 사고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등 트라우마를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가늠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이들이 많았다. 김 교수는 그림으로 이들의 심리 상태를 진단하고, 다양한 미술 프로그램을 통해 상처를 치유했다.

그런 그가 hello! Parents와 함께 ‘그림으로 하는 마음 상담’을 시작한다. 그림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분석하고, 양육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미술 활동도 소개한다. 김 교수는 “코로나19로 오랜 사회적 격리 기간을 거치면서 우울과 불안,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늘어났다”며 “지금이야말로 아이들의 심리 건강 상태를 되돌아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미술로 치료가 될까? 된다!

김 교수는 상담 칼럼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술이 얼마나 큰 치료 효과가 있겠나’ 하는 의구심부터 떨쳐야 한다고 말했다. 바로 그 의심이 미술 치료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Q. 미술 치료가 친근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정확히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효과에 대한 의심이 드는 것 같아요.

A. 미술 치료는 미술 활동을 통해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게 하고, 심신의 안정을 찾아주는 치료법이에요. 그림 그리기 외에도 만들기, 부수기, 쌓기 등 다양한 활동을 하죠. 일상 속에서는 꺼내기 힘든 자신의 감정, 갈등, 공격성까지도 마음껏 표출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알게 되고 마음의 짐을 더는 심리적인 치료 효과가 분명히 있어요.

Q. 미술 치료를 통해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암환자에게 미술 치료가 어떻게 도움이 되나요?

A. 암환자는 죽음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억울함 등으로 인해 마음이 매우 복잡합니다. 미술 치료에선 먼저 ‘당신이 암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의 생각과 감정을 그려 보라’고 해요. 그림을 보면 환자가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드러나죠. 암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정의 단계인지, 화를 내는 분노의 단계인지, 아니면 모든 걸 다 받아들인 수용의 단계인지요. 이를 토대로 각 상황에 맞는 미술 치료가 들어갑니다. 치료 과정에서 자기의 감정을 마주하고 그림에 쏟아내면서 심리적으로 치유되는 분이 많아요. 이렇게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으면 생존율, 완치율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요.

Q. 장애 아동에겐 미술 치료가 어떤 효과가 있나요?

A.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어요. 그림도 자기가 관심 있는 한 가지 주제만 계속 그리는 경향이 있죠.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만 그리는 식으로요. 그런데 1년 동안 미술 치료를 받으면 엘리베이터에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요.

Q. 어떤 변화가 보이던가요?

A. 처음에는 문도 안 열리는 답답한 엘리베이터를 그리죠. 그러다 엘리베이터 안에 문이나 버튼 같은 것도 생기고, 마침내 사람도 그려요. 자폐증 아이에겐 그게 큰 변화고 발전입니다. 미술이 자기 안에 갇혀 있던 관심을 밖으로 돌리는 역할을 한 겁니다. 자폐증 아이에겐 그림 그리기뿐 아니라 점토 같은 부드러운 재료로 스트레스를 풀게 하기도 하고, 다양한 재료를 접하게 함으로써 변화에 대처하는 힘을 기르는 치료도 많이 합니다. 

Q. 트라우마를 남기는 큰 사건을 겪은 사람에게도 미술 치료가 효과가 있을까요?

A. 성폭력 피해 아동을 상담한 적이 있어요. 싫어하는 사람을 그려보라고 했죠. 처음에는 짝궁, 그다음에는 이혼해 따로 사는 아빠를 그리더니 세 번째 만났을 땐 치마 입은 남자를 그렸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가해자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에게 치마를 입힌 건 아이의 바람 때문이었어요. 가해자가 여자처럼 힘이 약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요. 미술 치료를 통해 사건을 마주하는 힘을 길렀기 때문에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거죠. 이후에 저는 점토로 사람을 만들고 난 후 망가뜨리게 하거나 점토 칼로 찍고 후벼 파고 식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Q. 코로나19로 아이들의 정신 건강이 위태로워졌다고들 합니다. 그림을 통해 본 아이들의 상태는 어땠나요?

A. 가장 두드러지는 건 그림 속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거죠. 그 외엔 얼굴을 찡그리거나 혼자 있는 사람 그림이 많아요. 학교도 못 가고 친구도 못 보니 답답하고 외로운 마음이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는 그림들도 있어요. 코로나에 걸리면 가족이 다 모여 지내게 되잖아요. 격리해야 하니까요. 그 격리 시간이 아이들에겐 즐거운 시간이었던 겁니다. 맞벌이 가정의 경우 그렇게 가족이 모여 있기도 어려우니까요. 아이들이 경험한 세상은 이렇게 우리 생각과 다르기도 해요.

그림이 모든 걸 말해주진 않는다

미술 치료에서는 상담자가 그린 그림의 각 요소를 분석해 심리 상태를 진단한다. 수많은 임상 사례를 토대로 그림으로 나타난 무의식적인 심상을 해석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천편일률적인 분석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장의 그림이 모든 걸 말해주진 않는다는 얘기다.

Q. 그림을 통해 심리를 분석하려면, 어떤 걸 그리게 해야 하나요?

A. 그림에는 한 사람의 감정, 생각, 경험 등이 담겨 있어요. 그림 심리검사에서는 특정 상황을 주기도 하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라고도 해요. 특정 대상을 그리라고 지시할 때는 집, 나무, 사람, 가족, 학교생활 모습, 빗속에 서 있는 사람, 사과 따는 사람 등을 그리라고 해요. 검사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건 한 장의 종이에 집, 나무, 사람을 함께 그리는 KHTP 검사(Kinetic House Tree Person)예요. 종이에 집과 나무 한 그루를 그리고, 뭔가를 하는 사람을 그려보라고 지시합니다. 아이가 집, 사람, 나무 중 무엇을 가장 크게 그렸고, 나무는 집과 사람에게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등 각각 요소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Q. 나무, 집, 사람 각각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나요?

A. 집 그림에선 가정을 포함해 물리적인 생활 환경과 대인관계에 대한 태도를 살펴볼 수 있어요. 나무를 통해선 무의식에 잠재된 심리적, 신체적 자아상을 엿볼 수 있고, 사람을 보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느끼는지 짐작해 볼 수 있죠. 집 그림의 예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볼게요. 창문은 아이가 대인관계에서 겪는 경험과 느낌을 상징합니다. 아이가 그린 집에 창문이 없다면 외부에 무관심하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폐쇄적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죠.

Q. 각각 그림을 분석할 땐 어떤 사항을 주의 깊게 보나요?

A.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부터 세부적인 요소까지 다 고려합니다. 일단 무엇을 그렸는지 봅니다. 그 대상을 종이의 어디에 배치했는지, 각 대상 간의 구도와 거리도 따져 봅니다. 어떤 색을 쓰고, 얼마나 굵은 선으로 그렸는지도 살피죠. 그림을 그리는 과정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해요.

Q. 그리는 과정도 고려하는군요.

A. 어떤 걸 먼저 그리는지, 생략하거나 지운 것은 없는지, 그림을 그리다 망설여서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는지 보는 겁니다. 제일 먼저 그린 대상은 가장 관심이 있는 대상을 나타내요. 그 대상을 그리는 데 자신이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고요. 무언가를 그렸다 지웠다 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숨기고 싶다는 걸 뜻하죠. 예를 들어 성폭력을 당했던 아이들은 하반신 성기 부분을 그렸다 지웠다 하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그림 심리 검사를 할 때는 그리는 과정도 관찰하고, 그림에 대해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Q. 그림과 관련해서 어떤 대화를 하나요?

A. 가족 그림을 그렸다면 각각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이런 모습이 일상의 흔한 모습인지 등을 물을 수 있어요. 그림에서 자신의 기분은 어떤지, 가족이 함께 있으면 기분이 어떤지 묻죠. 어떤 가족 구성원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 없지만 무엇을 하는지도 물어봐요. 그림을 어떤 생각과 의도로 그렸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Q. 아이가 별다른 의도 없이 그림을 그렸거나 표현력이 부족할 수도 있지 않나요?

A. 그럴 가능성도 있죠. 그래서 그림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아이가 그린 그림에는 다 이유가 있거든요. 상담했던 부모님 중에 아이가 종이 전체를 온통 검은색으로 칠했다면서 걱정하시던 분이 있었어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요. 아이에게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물으니 ‘김’을 그렸다는 거예요. 언젠가 아침에 엄마가 구워줬던 고소한 참기름 냄새 풍기는 윤기 나는 김이 너무 맛있었다면서요(웃음). 아이 그림에 담긴 마음과 경험을 이해하는 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림 육아’의 핵심 준비물, 이것이다

김 교수는 미술이 치료 도구이기에 앞서 소통의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전문 미술 치료사가 아니더라도 양육자가 가정에서 그림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소통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림 육아’에 가장 필요한 준비물은 아이의 그림에 공감하려는 자세라고 했다.

Q.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낙서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잖아요. 아이의 그림에도 정상 발달 단계가 있나요?

A. 아이들은 첫돌부터 만 3세 정도까지 아무렇게나 잡히는 대로, 목적 없이 선을 그려요. 그리는 행동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러다 원 형태를 그리게 돼요. 이후 반복적이고 원근이 무시된 형태의, 자기가 중심이 되는 그림을 그리죠. 그림 속에 아이의 마음과 세계관이 드러나는 건 자아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는 만 3세부터입니다. 만 5세가 지나면서 좀 더 정확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심리 분석이 가능해요. hello! Parents와 하는 ‘그림으로 하는 마음 상담’을 만 5세 이상 아이로 제한한 이유죠. 그림 실력도 늘고, 말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능력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거든요. 다만 공격적이거나 우울한 느낌의 그림을 6개월 정도 계속해서 그린다거나 오랜 기간 한 가지 색만 고집해서 사용한다면 전문적인 상담 치료를 받아보는 게 좋습니다.

Q. 그림 그리는 걸 즐기지 않는 아이들도 있어요.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그런 경우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림 그리기 대신 아이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다른 미술 활동을 제안해 보세요. 무언가를 끄적이고 그리는 건 인간의 본능입니다. 만약 아이가 그림 그리기를 즐기지 않는다면 양육자가 무의식적으로 아이의 그림을 평가하진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아이가 그림에 대해 핀잔을 들었다면 잘 못 한다고 생각해 안 하려고 할 수 있거든요. 다만 가정에서도 어느 정도의 미술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Q. 가정 미술 교육요?

A. 양육자가 전문적으로 아이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사람 정도는 본래 제 형태대로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해요.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아이들이 사람 그리는 걸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어요. 만약 그쯤에도 사람을 동그라미에 막대 모양으로만 그리고 있다면, 사람의 형태를 제대로 그릴 수 있도록 알려주어야 한다는 거죠. 얼굴, 목, 몸통, 손, 발, 다리를 제 위치에 그릴 수 있도록요. 그리고 한 가지, 만 2~3세 나이라면 색칠 놀이는 권하지 않아요.

Q. 색칠 놀이가 왜 안 좋은가요?

A. 색칠 놀이에는 도안이 그려져 있죠. 아이가 먼저 대상을 관찰하고, 상상하고 자기 방식으로 표현할 기회를 앗아가는 거예요. 색칠 놀이에 익숙해지면 아이만의 고유한 그림체가 사라집니다. 그저 도화지에 색연필, 크레파스 정도면 충분합니다. 자유롭게 그리는 게 창의성 발달에도 더 좋습니다.

김 교수는 “아이 그림 수준과 완성도에만 관심을 가지거나 평가하려 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이의 그림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기질과 개성도 모두 다르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육자의 잣대와 시선으로 아이 그림을 바라보면 그림 속 아이 마음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림으로 표현된 아이의 경험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들어 주세요. 엄마, 아빠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아이의 진짜 마음도 보입니다. 공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준비물이죠.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① 미술, 치료가 됩니다. 그림엔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 경험이 담겨 있어요. 숨겨진 마음을 그림이 말 대신 전해줄 수 있죠. 미술 활동을 통해선 일상에서 꺼내기 힘든 감정과 갈등, 분노를 표출하며 치유가 이뤄져요.
② 그림이 모든 걸 말해주진 않아요. 그림 심리 검사에선 대상과 위치, 구도, 거리, 색 등 다양한 요소를 살핍니다. 그린 순서와 지운 것 등까지 입체적으로 봐야 해요. 그림을 두고 대화도 나눠야 합니다.
③ 미술 치료의 핵심은 소통입니다. 가정에서도 양육자가 아이와 그림을 통해 대화를 나눠 보세요. 아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림 육아가 가능합니다. 이때 아이 그림을 평가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세요.

출처 : 종이 전체를 검게 칠한 아이, 당신이 부모라면 어떤 생각? | 중앙일보 (joongang.co.kr)